이희경 안나/성 김대건 성당/ Itasca , IL
“어머니, 엄마!” 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정겨운 이름인가! 입에 올리기만 해도 절로 웃음이 입가에 번지고, 따뜻하고 아늑함을 느끼게 하는 행복한 이름이다. 모든 사람들이 너무나도 편하게 부르는 이름, 어려울 때면 무의식중에 튀어 나오는 이름이건만, 나는 이 이름을 도무지 쉽게 부르지를 못한다.
딸이 귀한 집 5남1녀로, 그것도 막내딸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와 오빠들의 온갖 사랑을 다 받고 자랐지만, 정작 어머니의 사랑은 받질 못했다. 완고한 유교 집안에서 무남독녀 외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딸은 필요도 없는 것이 태어났다”고 하실 만큼 지독한 남아 선호사상을 지닌 분이셨다. 젖을 뗀 이후로 어머니의 품에 따뜻이 안겨본 기억도 없이 자란 나는 늘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다. 특히 다른 집 모녀의 다정한 모습을 볼 때면 나의 외로움은 더 크게 느껴지고,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되어 나를 괴롭히곤 했다. 자라는 동안 나의 꿈은 하루 빨리 어른이 되어 엄마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오빠를 다섯이나 두고도 지금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너무나 아끼는 아들에게 짐이 되고 싶어하지 않으시는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어린 시절 아버지의 천주교 입교로 나의 신앙생활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렇다 보니, 나는 채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목마름을 신앙생활에서 찾게 되었다. 레지오 마리애와 다락방 기도 모임도 열심히 하였지만 친정 어머니와의 관계처럼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성모님과 나 사이에도 늘 존재했다.
2000년10월 말 어느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거실 소파에 혼자 앉아 있을 때였다. 때는 오후 4시경이었는데, 평생 모시고 살지만 지금까지도 살가운 눈길 한 번 주는 적이 없고, 아무리 힘들 때도 집안일 한번 거들어주는 법이 없는 어머니 때문에 마음이 아파 피아노 위에 놓인 예수님과 성모님 사진을 바라보면서 마음 속으로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하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때였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상태에 빠져들었는데, 그때 성모님께서 거실 한복판에 서서 슬픈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입고 계신 흰 옷자락이 산들바람에 날리 듯 살랑거리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분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나는 너무 놀라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냥 멍하니 그 분을 올려다 보고만 있었는데, 성모님의 눈문이 피눈물로 변하더니 눈처럼 새하얀 옷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성모님은 계속 피눈물을 흘리시며 나를 불쌍하게 여기시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에게 통곡의 10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 것이다. 용기를 내어 열심히 기도하여라.”
이때 나는 성모님께서 흘리시던 피눈물이 곧 내가 흘릴 피눈물이라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다. 성모님의 환시를 보고도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성모님께서 흘리시던 그 피눈물과 “통곡의 10년”이라고 하신 말씀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에게 엄청난 고난이 다가오는구나!” 싶어 지레 겁을 먹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는 믿음이 부족했던 탓에 “내가 항상 네 곁에 있겠다.”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 고마움을 깨닫지 못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성모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큰 사랑과 은총을 베푸셨는가, 나는 얼마나 선택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지난 10년 동안 내게 일어난 일들은 통곡도 부족하리만치 고통스러운 것들이었지만, “성모님이 곁에 계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겨낼 수 있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 중 굵직한 사건들을 되짚어본다.
첫번째 통곡
2001년은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중요한 한 해였다. 5월 메모리얼 데이(미국의 현충일)에 꾸르실료 행사에 봉사자로 참석한 나는 주방에서 음식봉사를 하는 틈틈이 꾸르실료에 참석한 모든 교우들을 위해 빨랑까(palanca)를 작성하며 묵주기도를 끝없이 바치고 있었는데, 너무 힘이 들어 그랬는지 몸에 이상이 왔다. 너무 기운이 떨어지는데다 갑자기 심하게 하혈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3박4일 일정의 꾸르실료를 중도에 그만둘 수 없었기에 나는 성모님께 “봉사를 끝까지 마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묵주기도로 간절히 청하면서 진통제로 버티며 행사를 끝마쳤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즉시 응급실로 달려간 나는 “자궁암”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선고를 듣게 되었다.
암 선고를 받은 그 순간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암에 걸렸다는 두려움보다 나를 더욱 짓누른 것은 내가 식사를 차려드리지 않으면 음식에 손도 대지 않을 만큼 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계신 고령의 어머니와 이제 겨우 8살밖에 안된 막내의 존재였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웠지만 곧, “걱정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겠다”고 하신 성모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아무런 일이 없을 것’이란 굳은 믿음을 갖고 9.11 사태가 터진 날 새벽에 암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고통스러운 사건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와 우리 가족을 차례 차례 흔들어 놓았고, 나는 그때마다 기도로써 더욱 더 예수님과 성모님께 매달리게 되었다.
두번째 통곡
평소 성격이 온순하고 조용한 아이였던 둘째는 아이오와 주에서 생물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계시던 큰아버지의 사랑을 뜸뿍 받고 자랐는데, 어느날 그분이 미생물에 의한 감염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 바람에 친아버지보다 더 믿고 따랐던 둘째가 큰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우울증을 앓게 되었다. 그것도 보통 수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해하는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이었다. 교복을 입고 가톨릭 스쿨을 다녔기에 평소 아이가 자해한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나는 그 사실을 안 순간 너무나도 큰 충격에 아이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마음의 병이 든 자식을 고쳐보겠다고 용한 의사가 있다고 하면 천리길을 마다 않고 찾아다니면서 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신 성모님의 고통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매일 동네 성당에 나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특히 성당 밖에 아름답게 꾸민 십자가의 길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나는 위로를 받고 고통을 이겨낼 힘을 얻었다. 이후 나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짐없이 5년 가까이 계속되었는데, 이상하게도 어느날인가부터 더이상 바쳐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도를 하려 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주님의 뜻인가보다 하고 이후부터는 ‘하느님의 자비’ 기도를 바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매일 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세번째 통곡
어느날 남편이 허리를 다치는 바람에 직장도 잃고 집에서 쉬게 되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가라.”고 남편에게 위로의 말은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허리를 다쳐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동안 다니던 직장을 잃고 밖으로 내몰린 남편의 처지를 생각하니 그 사람이 겪을 육체적 심리적 고통 때문에 속도 상하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또 “나 자신도 암 환자인데, 온 가족의 생계를 혼자 떠맡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깜깜했다. 허리를 다친 남편은 이후 10년 동안 간간이 일을 잡기도 하였지만 3,4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쉬었다 일했다를 반복하게 되었다. 온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고 아픈 가족들을 돌보아야 하는 마음의 짐이 나를 짓눌러 마음 속으로 소리없이 통곡하였다.
네번째 통곡
첫째인 딸아이는 항상 남을 배려하고 이웃을 돕는 일에 망설이는 법이 없는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다. 주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깊어서 수녀가 될까 고민하기도 했던 그 아이가 대학 재학중 임신을 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나도 믿음직스럽고 항상 자랑스러웠던 아이가 그런 모습으로 돌아왔을 때 하늘이 노래졌다.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는가?” 싶어 또다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거부할 수는 없는 일. 다행히도 아이 아빠가 천주교 신자여서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끝내고 결혼식을 올렸으며, 딸 아이는 휴학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대학에 복학한 딸 아이가 다시 둘째 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또다른 어두운 암흑의 그림자가 밀물처럼 덮쳐오고 있었다.
다섯번째 통곡
부활절 새벽에 시어머니가 72세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셨다. 몸이 아파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아들 때문에 늘 미안해 하며 친정 어머니처럼 나를 챙겨주시던 분이었다. 언제나 냉정하기만 한 친정 어머니보다 더 친어머니같았던 분과의 이별은 내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미처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모든 가족이 정말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섯번째 통곡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뒤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사위가 급성 폐렴과 선천성 심장마비 합병증으로 내 딸과 손자를 남겨두고 하느님 품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어린 나이에 둘째를 임신한 상태로 어린 아들과 함께 혼자 된 딸을 보니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너무 기가 막혀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미칠 것 같았던 나는 성모님 앞에 꿇어앉아 또다시 통곡을 했다. 사위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딸 아이는 충격으로 인해 둘째 아이를 조산하였는데, 새 생명을 받았다는 기쁨보다 누구보다 기뻐하고 사랑해줄 아비없이 태어난 그 아이의 기구한 운명 때문에 가슴이 너무 시렸다.
일곱번째 통곡
치매를 앓고 계신 친정 어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행방불명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무려 7시간을 헤맸다.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분이 길을 헤맬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렇게 어머니를 찾아다니면서 나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잃으신 성모님의 그 놀람과 두려움, 고통을 생각하며 성모님께 기도를 드렸다, 엄마를 찾게 해달라고….
경찰과 경찰견까지 동원되어 온 동네를 다 수색한 끝에 집에서 1마일 가량 떨어진 한 아파트의 공원에서 어머니를 찾았다. 그후 어머니가 또다시 길을 잃을까봐 한국에 사는 큰 오빠에게 어머니를 맡기기로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엄마는 한국에서도 하루에 세 번씩이나 길을 잃어버려 다시 미국으로 모시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여덟번째 통곡
실버타운을 마련해서 어머니를 모시겠다고 평소 말하던 큰오빠가 몇 달 뒤에 어머니를 모시러 오겠다고 연락해왔다. 이제는 어머니도 안전하게 생활하시고 우리 가족도 마음 편히 살겠구나! 하는 희망으로 큰오빠가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내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온 지 2주일 만에 큰오빠가 주무시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6개월 사이에 사랑하는 가족을 셋 씩이나 하느님 곁으로 보냈다.
아홉번째 통곡
그동안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온 둘째 아이의 우울증이 점점 심해져서 도저히 빛이 보이지 않을 때였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치고 기도마저 지쳐가고 있을 때 나는 친구의 권유로 오하이오 주에 있는 마라나타 샘과 성지를 방문하게 되었다.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정말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실까, 반신반의했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2007년 5월26일 마라나타 샘과 성지로 떠나던 날, 반드시 함께 가겠다고 약속했던 둘째가 도망을 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나머지 가족들하고만 그곳에 가게 되었다. 성지에 도착하여 기도를 시작하자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내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상처의 딱지들을 하나씩 씻어내기 시작했고, 내 마음에는 위로가 가득 찼다.
기도회관에 들어갔을 때는 진한 장미 향기가 진동해서 어딘가에 장미꽃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같이 간 여러 사람에게 “이 장미 향기가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장미 꽃 향기가 안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오직 우리 부부만이 장미꽃 향기를 맡고 있었다.
기도회관을 나와서 눈물의 호수로 갔을 때였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너무나 편하고 평화로운 마음이 들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호숫가에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마침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는데도 미동도 않고 앉아서 그 비를 다 맞았다. 옷이며 머리가 흠뻑 젖었지만 마음만은 마냥 평화롭고 행복했다.
눈물의 호수를 떠나 십자가의 길이 있는 숲을 향해 걸어가면서 벌판에 잔디와 클로버가 섞여 있는 것을 보고 문득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면 나에게도 행운이 오지 않을까?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막내와 함께 네 잎 클로버를 찾으러 벌판을 헤매기 시작했지만 단 하나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주님! 당신이 이곳에 현존해 계신다면 그 징표로 제게 네 잎 클로버를 보게 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런데 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발을 내딛는 곳마다 네 잎 클로버가 눈에 뜨이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오로지 내 발 앞에서만 보였다. 순식간에 20잎이 넘는 네 잎 클로버를 따서 다락방 기도책 갈피에 끼웠다가 만나는 사람마다 주님의 축복을 빌며 나눠주었는데, 결국에 남은 것은 오직 단 한 장 뿐이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을 겪으면서 우리 가족은 기쁨 속에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갔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 제8처에 다다랐을 때 나는 누군가 나를 뒤에서 꼭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포근한 느낌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위로를 내 마음에 주었다. 나는 주님과 성모님의 현존을 몸으로 눈으로 느끼면서 주님의 사랑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체험하고, 내 십자가를 계속해서 지고 갈 힘을 얻었다. 그래서인지 순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6시간 넘게 운전을 하면서도 전혀 피곤한 줄 몰랐고, 하느님 은총에 대한 감사가 마음을 가득 채워서 행복하기만 했다.
열번째 통곡
2009년 12월2일. 나는 또 한 번의 큰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자살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막내와 둘째가 BB 총을 가지고 놀다가 막내가 쏜 총알이 둘째의 왼쪽 눈을 파고 들어가 결국에는 왼쪽 눈이 실명되었고, 그 충격에 막내가 집을 나가서 행방을 알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그 총알은 시신경과 뇌 사이에 박혀 자칫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을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나는 예수님의 성시를 품에 안으신 성모님의 통고를 생각하며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슬피 울었다. 10년 가까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온갖 일들을 겪으면서도 기도로 주님과 성모님께 의탁하며 견뎌온 모든 시간과 인내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한발짝도 내디딜 수가 없었던 나는 내 십자가를 내려놓기로,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식구들이 모두 잠든 어느날 밤, 새벽 2시쯤 유서를 쓰려고 준비하며 주님께 용서를 청하는 기도를 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 초저녁 잠이 많은 한 친구가 꼭두새벽에 전화를 걸어와 자살로 가는 길목을 막아버렸다. 친구로 하여금 새벽에 전화를 걸게 하시고 나의 자살을 막으신 하느님! 나는 다시 주님의 사랑과 은혜로 마지막 힘을 얻어 그 고비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그리도 오랫동안 둘째를 괴롭히던 우울증이 씻은 듯이 사라져서, 둘째는 긍정적이고 활기 넘치는, 꿈과 희망을 가진 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둘째 아이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겸손하게 받아들였으며, 수술과 모든 치료가 끝난 후 성당에서 주님께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를 살려주시고 2개의 눈 중에서 한 쪽 눈이 남아 있어서 앞을 볼 수 있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주신 두 눈을 온전히 지키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부터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
이제 성모님께서 경고해주신 통곡의 10년은 모두 지나간 듯하다. 여기에 나열한 일들 외에도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일들이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지만, 마치 태풍 뒤의 고요함처럼 우리 가족은 이제 안정을 찾아가고 있고, 매 순간 주님의 도움의 손길이 있었음을, 성모님께서 곁에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셨음을 느낀다.
남편은 오하이오 성지를 다녀온 후 많이 변화했다. 관면혼배를 해놓고도 27년간 입교하기를 완강히 거부했던 그가 때때로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성당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곰곰히 생각에 잠기곤 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성체를 모시고 싶다고 제발로 신부님을 찾아가 1년간 교리공부를 하고 세례를 받았다. 그는 기도도 열심이지만 성서 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 말씀하신 통곡의 10년이 지나서인지 남편은 올 3월부터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 꾸준히 일하고 있다
눈을 다친 후 대학 진학을 포기했던 둘째는 자기가 좋아하는 스시 셰프 일을 시작했는데, 한식의 매력에 푹 빠져서 한식을 세계적인 음식으로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하루 하루 땀방울을 흘리며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주님께도 순종하여 성당에 갈 때는 먼저 나서는 아들이 되었다.
오하이오에 함께 갔던 막내는 이제 대학 1학년생이 되었다. 믿음이 아직 자라지 않아 그동안 성당에 꾸준히 나가지는 않았지만, 신앙생활에 대한 자세가 많이 달라졌다.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고 신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아직은 혼란스러운 것이 많아 그렇지만,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더니, 올해는 재의 수요일에 자진해서 미사에 참석해 이마에 재를 바르고 돌아왔다.
나는 암이 발병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어려운 시간들을 지나오면서도 별다른 이상없이 건강을 유지해오고 있고, 성실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딸 보기를 한결같이 차갑게 대하셔서 지금도 가끔씩 내 가슴을 한없이 시리게 하는 분이지만 친정 어머니 역시 치매에 걸리신 걸 빼고는 아직도 건강하신 편이다.
성모님께 드리는 나의 노래
나에게 어려운 일이 닥쳐올 것을 미리 알려주시고 용기를 북돋아주신 성모님, 감사합니다. 험난한 길을 걷던 지난 시간동안 늘 곁에서 지켜주시고 도와주신 성모님, 사랑합니다. 아직도 ‘엄마’라고 부르기는 쉽지 않지만, 저에게 어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보살핌을 받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주시고, 늘 성모님께 기대어 살게 해주신 성모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 압니다. 기도와 완전한 봉헌만이 저를 위해 마련하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길이란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모든 고난을 온순하게 받아들이면 원수 같은 악마도 물리칠 수 있고, 나를 성화시켜 주님의 뜻에 따르게 한다는 것을…. 주님, 성모님, 저와 저희 가족을 변화시켜 주신 것 감사합니다. 저에게 주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도록 해주시고, 주님의 길을 용감히 따라가도록 해주신 하나되신 예수 마리아 성심이시여, 찬미 받으소서!
살아가면서 생각지도 못했던 힘든 고난에 부딪치게 되면 앞날이 캄캄해지고 아득해져서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든 고난에는 주님께서 함께 해주십니다. 또 주님께 의지하여 어려움을 견뎌낼 때는 그 뒤에 오는 축복도 함께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는 모든 고난은 주님께서 그 분의 큰 능력을 드러내 보여주시기 위한 것임을 굳게 믿습니다. 아멘. †
한 요한/라스베가스
내가 처음 마라나타 샘과 성지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2008년에 라스베가스의 우리 집으로 휴가차 놀러오신 뉴저지 이모님 때문이었다. 이모는 내게 성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고, 그 이야기는 내 삶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그곳 성지에 발현하셔서 가르쳐 주고 계신 진리와는 아주 먼 세상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내가 그런 삶을 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아버지를 돌아가시게 한 친척들에게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분노와 용서못함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막 사춘기로 접어들던 13살 때 돌아가셨다. 그때 아버지의 형제분들은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해서 허구헌날 치고 받고 하면서 다툼을 계속하고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셨던 아버지는 동생들의 싸움을 중재하려고 노력하시다가 오히려 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기까지 하셨다. 이렇게 집안 일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셨던 아버지는 결국 간암 말기 선고를 받으셨고, 그로부터 얼마 안되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의 죽음이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버지를 제외한 우리 가족, 어머니와 남동생,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이틀 전까지도 아버지의 위급한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그렇게 일찍, 갑작스럽게 다가왔고, 13살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던 나는 준비없이 맞게 된 아버지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직 어리기는 했지만 이미 사춘기에 접어들어서 세상 물정에 눈을 뜨기 시작했던 나는 어느 정도 친족들 간의 불화를 눈치채고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던 친족들에게 복수하겠다는 무시무시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너무 어려서 복수할 힘이 없었던 나는 그때부터 오로지 “힘을 길러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친족들에게 피가 마르는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기 시작했다. 그 복수심은 아버지라는 울타리를 잃고 나서 직면해야 했던 차갑고 냉정하기만 했던 현실을 이를 악물고 견디게 해주었다. 머리 속엔 오로지 “그들에게 복수하기 전엔 절대 먼저 쓰러질 수 없다”는 생각 뿐이었다. 복수심은 내 삶의 원동력이었고, 나의 힘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는 내 인상은 “얼음처럼 너무 차갑고 냉철하다”, “가끔 살기가 느껴져서 무섭기까지 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과 목표를 마음에 품고 살면서 어느덧 10년이 지난 때였다. 이젠 어느 정도 능력도 생겼고 힘도 생겼으니 계획을 실천에 옮겨야 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생각해 왔던 것과 달리 마음이 흥분되거나 기쁘기는 커녕 점점 허무해지고 마음이 메말라가는 내적 갈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내적 갈등은 갈수록 커져서 말로 이루 표현하기 힘들 만큼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래서 나는 그 고통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잊으려고 노력하기 시작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돌아오는 것은 점점 더 큰 마음의 공허와 메마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행복했던 어린시절의 추억 하나를 떠올리게 되었다. 순진하고 천진난만했던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나가 주님 안에서 느끼곤 했던 그 안온한 평화와 충만한 행복감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그 추억은 마치 사막에서 목이 말라 사경을 헤매고 있는 내게 어디선가 물 한 방울이 날아와 입술을 적셔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기는 했지만 나는 다시 마음의 평화를 느끼는 동시에 내가 얼마나 주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왔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그때의 기도는 어렸을 때의 기도와 달라도 한참 달라져 있었다. 어렸을 때는 주님께서 바로 앞에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같았는데, 이때는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도 내 기도가 전해지지 않을 것처럼 주님께서 저 멀리, 아주 멀리 계시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지금까지 삶을 완전히 잘못 살았구나!” 라는 후회와 절망감을 느꼈다.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위안을 얻고, 세상적인 것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나는 잘못을 깨닫고 주님께로 돌아서려고 했으나 그때는 이미 너무나도 오랜 세월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있었음을 깨달았다. 분노와 용서못함이 이끄는 죽음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그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빛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그저 답답하고 괴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기도를 하려고 하면 할수록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예수님과의 거리감 때문에 조바심이 나고 절망감이 깊어졌다. 급기야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주님께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다.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아왔으니…. 어차피 희망이 없는 삶, 더 살아서 뭐하겠나. 여기서 목숨을 끊어서 끝내자.” 이런 생각마저 든 나머지 이것을 행동에 옮기려던 찰나에 갑자기 옛날에 성당에서 배운 ‘자살의 죄’에 대한 가르침이 기억났다. 그러자 “지금까지 지은 죄도 엄청난데 거기에 자살하는 죄까지 얹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죄인의 입장에서 주님께서 들어주시든 안 들어주시든 앞으로 한 발자국씩, 안되면 반 발자국씩이라도 다시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하여 되든 안되든 꾸준히 기도를 계속 했지만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온 모든 죄와 악은 나를 절대 놓아 주지 않았다. 주님과의 거리감도 전혀 좁혀지지 않아서 기도할 때면 혼잣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그나마 남아 있던 속죄의 의지마저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이렇게 영적인 갈증이 점점 더 내 목을 조여 오던 때였다. 오랜만에 놀러 오신 이모님이 오하이오 주에 있는 마라나타 샘과 성지에 대해서, 그곳에서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총과 기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다. 그때 내 영혼이 바로 반응을 하듯 “죽어도 그곳에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고, 나는 바로 비행기 표를 끊고 이모와 사촌 동생과 함께 셋이서 오하이오 성지를 향해 떠났다.
그때부터 내 안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서 잠을 청하고 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이젠 됐어!” 하는 안도감과 함께 너무나도 오랜 만에 마음의 안정을 느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왜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성지라는 곳에 도착했지만 대중 발현이 없을 때여서 그랬는지 그곳은 그저 한적하고 평화롭기만 했다. 이모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기도센터 맞은편 정중앙에는 성모상이 놓여 있었다. 그 성모상을 본 순간 나는 왠지 모르지만 무언가가 나를 감싸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이었기에 싫지는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열심히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강한 장미향이 코 끝을 건드렸다. 놀란 나는 속으로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면서 눈을 번쩍 떴는데, 그때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눈 감고 기도하고 있을 때 장미향 향수를 뿌린 사람이 지나갔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하자 사라졌던 장미향이 이번에는 더욱 강하게 풍기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눈을 번쩍 뜨고 재빨리 주변을 살폈지만 주변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아, 성모님께서 여기 진짜 계신가 보다” 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그동안 원수로 여겨온 친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생각났는데도 불구하고 분노나 복수심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동정심이 드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너무나도 불쌍하게 여겨진 나머지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야겠다는 생각마저 들면서, 그들을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그 순간 내게 일어나고 있었다. 내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알 수 없는 저 깊은 곳으로부터 용서하고 싶은 마음, 기도해주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쳐 올랐다. 십 여 년을 가슴에 품어온 칼날 같은 복수심이 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대신 동정심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때까지 내 마음을 무겁게 옥죄여온 마음 속 쇠사슬이 “철컹”하고 소리를 내면서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순간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마음이 가벼워지면서 자유롭고 평화로워졌다. “나 같은 죄인도 이렇게 받아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구나” 하고 주님의 은총에 감격해 그 자리에서 눈물을 펑펑 흘렸다. 얼마나 갈망했던 마음의 평화와 자유인가! 정말 행복해서 미칠 것 같았다.
성모님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 날 성지순례를 끝내고 근처에 사시는 한 자매님 댁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 자매님으로부터 오하이오 성지를 알게 된 후 온 가족이 자청해서 천주교에 입교하여 세례를 받고, 기도 속에서 결국은 오하이오로 이사 오게 된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족이 받은 은총과 축복, 그들의 변화된 모습과 신앙 안의 삶에 대해 보고 들으면서 내 몸과 영혼이 다시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늦은 밤, 이야기를 끝내고 “오하이오 성지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흐믓해 하면서 잠을 청했다. 그때는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는데, 그 집 주인 자매님이 우리가 더위 때문에 잠을 못 이룰까 봐 에어컨을 너무 세게 트신 나머지 한 여름인데도 이불을 똘똘 말고 잠을 자야 할 만큼 추웠다. 먼 길의 여행과 새로운 경험으로 흥분 속에 곤히 잠이 들었을 때 에어컨이 꺼졌는지 갑자기 더워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꼭 덮고 자던 이불도 차버리고 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더위 때문에 잠에서 반쯤 깨어난 순간 꿈인지 생시인지 눈 앞에 어렸을 때부터 받았던 상처의 기억들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영화 장면처럼 지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들까지 하나 하나 다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은 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 하나 하나에 담긴 슬픔과 고통이 한꺼번에 나를 덮치면서 숨을 조여왔다. 점점 숨이 막혀서 “아, 이대로 가다간 죽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갑자기 눈 앞에 엄청나게 큰 불꽃이 나타났다. 그 불꽃은 아까부터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나간 상처에 대한 기억의 고통이 극에 달했다. 그래서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때 그 큰 불꽃이 내 눈 앞에 보이던 기억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태워버렸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죽을 것처럼 느껴지던 고통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너무나 편해졌다. 마치 막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처럼 가볍고 깨끗한 느낌과 함께….
놀라서 눈을 떴더니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옆에서 자고 있던 이모와 사촌 동생을 건너다 봤더니 그 두 사람은 아직도 추운지 이불로 몸을 푹 덮고 자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땐 마음과 몸이 너무나 상쾌했다. 전날 밤에 있었던 일 때문에 다시 한번 옛날의 기억을 하나 하나 더듬어 봤지만 어느 것도 더이상 마음을 아프게 하진 못했다. 성령께서 나의 영적 상처를 한번에 치유해 주신 것이었다.
많은 은총과 치유를 받고 집에 돌아간 나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가슴 속에 박혀 있던 가시와 칼들이 뽑힌 자리에 새 살이 돋아나듯 그동안 나와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잃었던 것들이 하나 둘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성지에서 주시는 메시지들이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의 깊이를 더욱더 마음 깊이 느끼게 됐다.
심지어는 성당에서 신부님들께서 성체성사를 준비하실 때 예수님께서 그곳에 현존하시고 사제의 손을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시고 있다는 것까지 강하게 느끼고 알게 됐다. 전에는 없었던 사제들에 대한 존경심까지 생기고, 성체성사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크나큰 은총이라는 것도 확신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매주 한 번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귀찮아 했던 내가 이제는 성체를 모시는 기쁨에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지에서 받은 양심조명의 은총이 계속되어서 그런지 잦은 양심조명이 일어나서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크고 작은 죄들을 깨닫게 되고, 고해성사를 자주 보게 되었다. 흐르는 물에 먼지가 씻겨져 나가듯, 시간이 흐를수록 내 영혼을 혼탁하게 만들었던 죄의 흔적이 점점 더 사라지고, 죄로부터 멀어져서 영혼이 맑아진 느낌이다. 지금은 단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친가와도 서로 화해하고 용서를 해서 그동안 끊어졌던 가족의 끈이 다시 이어졌고, 지금은 연락을 주고 받으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가슴에는 복수의 칼 대신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는 열망과 사랑이 가득 차서 기쁨과 희망 속에 의학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할 때 주님께서 바로 앞에서 들어주시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된 것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은 지금 나는 너무나도 행복하다. 언제나 거룩한 사랑 안에서 살라고, 모든 것을 당신께 내맡기고 돌아오라고 오하이오 마라나타 성지에서 주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는 하루 하루 내 삶을 새롭게 하고 사랑으로 채우는 빛이 되었으며, 우리를 거룩한 사랑의 참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내비게이션이다. 지금은 대중발현이 있을 때마다, 그리고 주님과 성모님의 품이 그리울 때면 언제나 지체없이 오하이오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사랑의 힘을 얻고, 숨길 수 없는 가슴 벅찬 행복을 얻는다.
이제 내 앞에 펼쳐질 인생은 주님 안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 이 글을 읽게 될 형제 자매님들 가운데,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죄가 너무 무거워 주님께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우리 예수님은 회개하고 용서를 청하는 사람은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용서해 주실 뿐 아니라 오히려 당신께 돌아와 준 것을 고마워 하시는 그런 분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뉘우치며 모든 것을 예수님께 내맡기는 마음 뿐이다. 지금도 길잃은 양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 예수님은 진정한 용서이시고 사랑이시고 생명이시다.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김 비비안나/오하이오
살다 보면 기쁜 일, 즐거운 일도 많지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은총이 함께 따라온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그 말씀을 5년 전에 있었던 한 여행에서 체험했으며, 그 일은 나와 내 아이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거룩한 사랑을 마음에 품 고 사는 새로운 삶은 지금부터 5년 전인 2005년 12월 12일에 시작되었다.
5년 전인 2005년 겨울, 당시 커다란 심적 고통을 겪고 있던 나에게 성당에 다니시는 한 자매님이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던 “마라나타 샘과 성지”라는 곳을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를 해왔다. 그곳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이 발현하셔서 메시지를 주시는데, 그 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평화와 영적•육적인 치유를 주신다고 했다. 당시 성당에는 나가본 적도 없고, 가톨릭 신자는 더더구나 아니었으며, 성모님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던 나는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반신반의하며 순례의 길에 동참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생소했던 순례 여행은 그렇잖아도 마음이 불편한 내게 거슬리는 것 투성이었다.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서로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는 것도 귀에 거슬렸고, 여행 내내 미친듯이(당시에는 그렇게 느껴졌었다) 바치는 묵주기도도 거슬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지라는 곳에 도착하고,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신다는 자정 무렵에 발현 장소인 벌판에 나가보니 약 5천명 가량 되는 많은 인파가 모여 있었다. 그 날은 세포까지 얼어붙을 듯한 매서운 날씨였는데, 그 혹독한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허허벌판에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신앙심이 전혀 없던 나는 “원 세상에, 이렇게 미친 사람이 많을 수가 있나! 대체 왜 이 추운 날씨에 여기 와서 이러고들 있는 걸까?” 하는 말이 입 속에서 맴돌았다. 그 사람들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모든 것이 그저 놀랍고 신기할 뿐이었다.
드디어 예수님과 성모님이 발현하신다는 신호로 “무릎을 꿇으 시오” 라는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혹시나 하고 기대를 하고 왔던 나는 성모님을 보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내 눈에는 어둠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싶은게 모든 것이 거짓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성지에 머무르는 동안 마음의 평화가 느껴지기는 커녕 오히려 살아오면서 두 번 다시는 기억하기도 싫은 여러 가지 혐오스런 추억들이 머리 속에 한 장면 한 장면 떠오르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기분이 상한 나는 “이런 것이 무슨 성지야,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현상은 성모님이 내게 주시는 ‘양심성찰’ 이었다. 이곳 성지에서는 각 개인의 가장 아픈 문제를 어떤 경로를 통해서 보여주고, 또 그것을 치유시켜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겪은 이 체험은 아마 이곳을 방문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경험했을 것이라 여긴다.
집에 돌아온 지 2주일 후, 어찌된 일인지 다시는 못 갈 데라고 여겼던 곳을 나는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개인적으로 다시 찾게 되었다. 오후 늦은 시간에 도착한 그곳은 처음 왔을 때 보았던 그 많은 인파는 모두 사라지고, 사람의 그림자 하나 찾아볼 수 없이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그 넓은 벌판에 달랑 선 우리 세 식구는, 먼저 벌판 뒤쪽에 위치한 ‘십자가의 길’ 14처를 돌기로 했다.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뒤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을 14 장면으로 나눠 묵상하도록 만든 그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그 모든 것을 낯설어 하던 아들애가 무척이나 따라다니기 싫어하며 온갖 혐오스러운 말과 행동으로 나를 괴롭히더니 급기야 침까지 뱉는 것이 아닌가. 우리 세 식구는 끝내 서로 크게 다투며 그곳을 떠났다.
“밥이나 배불리 먹고 숙소로 돌아가 잠이나 자자”며 식당으로 향하던 나는 “이래 가지고야 우리가 무슨 은총을 받겠나” 싶은 생각이 들어 그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식사를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에 아들애가 갑자기 그 성지에 다시 가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 참았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아니, 그 성지에서 “예수님 좋아하네, 예수님이 어딨어?”하며 유난히 별의별 불순한 말을 다 했던 애가 이제 와서 왜 또 거기를 다시 가자고 하는 것인가?
기가 막혔다. 그리고 이미 날이 어두워져 컴컴했기 때문에 나는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하고는 눈을 부릅뜨고 “숙소로 돌아가 잠이나 자“ 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딸애가 조심스레 다가와서 “엄마, 쟤가 아까 ‘십자가의 길’에서 너무 못되게 군 것이 후회되어서 지금 당장 가서 회개를 하고 싶다고 해. 그러니 엄마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하는 것이 아닌가. 회개란 말이 그렇게 쉽게 나오는 말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깜짝 놀라 “아니 저 애가 회개를 한대? 정말 회개란 말을 했어?” 하고 반문했다. 오후에는 무언가에 씌우기라도 한 듯 그렇게 못되게 굴던 애가 ‘오늘 밤 안으로 꼭 회개를 해야 하니 지금 당장 다시 가자’고 하는 말을 듣고 나는 ‘애가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겠다는데 엄마인 내가 어떻게 그 기회를 거절할 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치 이상한 현상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마음을 풀고 다시 성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윽고 성지에 도착했을 때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대지를 뒤덮고 있었다. 성지 안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가면서 통고의 성모 마리아 상이 있는 눈물의 호수 곁을 지날 때였다. 약 15미터 정도 떨어져 있던 통고의 성모 마리아 상으로부터 갑자기 찬란한 흰 빛이 내게로 쫘악 비춰오는 것이 아닌가. 하도 이상해서 나는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것이겠지’ 하고 중얼거렸는데, 옆에 있던 아이들이 빛이 나오는 곳이 아무데도 없다고 했다. 게다가 낮에는 평범한 흰색 동상으로 보이던 것이 당시에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생기있게 보였다.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와 혈색이 도는 듯한 양 볼, 그리고 입가에 너무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 성상은 나를 보고 있었다.
도저히 믿겨지지가 않아서 나는 그것이 성상인지 사람인지 직접 확인하러 가까이 다가갔다. 약 3미터 정도 거리에 다다랐을 때 그 성상은 다시 사람이 아닌 동상으로 변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 그렇지. 사람일 리가 없지. 이렇듯 동상이 분명한데 아까는 왜 그렇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지?’ 하며 실망감을 느끼려던 찰나에 갑자가 가슴이 온화해지며 몸과 마음이 신비한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는 좋은 느낌이었다. 이 세상 모든 고통과 짐을 벗어버리고 하늘에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마냥 좋고, 황홀하고, 평화로웠다.
주위를 돌아보니 뒤따라온 아이들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세 식구는 너무 좋아서 눈밭 위를 미친듯이 뛰고 뒹굴었다. 추위는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갑자기 향기로운 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원 세상에 이럴수가! 그 날은 2005년 12월 27일이라 주위가 온통 눈에 덮혀 얼어 있을 뿐 꽃이라고는 한 송이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우리는 근원지를 알 수 없는 그 좋은 향기에 취해 막연히 천국같은 행복감에 젖어 있었으며, 평생 잊지 못할 평화를 맛보았다.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해서 그 후에도 밤에 그곳에 여러 번 가 봤지만 그런 현상은 다시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우리 세 식구는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생 처음 느꼈던 그날 밤의 행복감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느낌은 우리 가족에게 힘이 되어 주었고, 위로가 되었으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서 우리를 서서히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행복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성당을 찾게 되었고, 교리를 익히고 성경을 배워 드디어 2006년 9월 23일 세 식구가 나란히 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성당에서 세례를 받던 날, 이제부터 성체를 영함으로써 주님을 내 안에 모실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감격하여 감사와 찬미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때 나를 부르셨던 그 하얀 고통의 성모 마리아 상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어온 많은 죄를 눈물로 회개하며 이 감격과 평화와 행복감을 주신 주님과 성모님께 충실한 종이 되고 주님의 가르침 대로 따라 살며 올바른 신앙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 가족의 삶은 이전과 180도로 달라졌다. 모든 것을 주님께 내맡기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했다. 기도는 우리 생활의 가장 큰 기쁨이 되었고, 우리 세 식구를 하나로 더 단단히 묶어 주는 끈이 되었다. 마라나타 샘과 성지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우리 대화의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고, 메시지를 통해 말씀하시는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우리의 생활 목표가 되었다.
거룩한 사랑을 언제나 마음 속에 새기며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대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내 주장을 하기 전에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남을 더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으며, 나를 내세우기보다는 뒤에서 다른 이들을 돕게 되고, 오랜 동안 의절한 이웃과도 화해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외적인 변화도 가져와서 오랜만에 만나는 이들은 내 얼굴이 몰라보게 환해졌다고 다들 반색이다.
언제나 마라나타를 그리워하던 우리 세 식구는 드디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오하이오로 이사를 가서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봉헌하며 사는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2009년 5월 말 성지 근처로 아예 이사를 해서 지금은 이곳에서 진실로 평화롭게 주님과 성모님의 품 안에서 살고 있다.
2005년의 그날 이후 우리 세 식구는 매일 밤 모여 기도하고 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우리가 모여 묵주기도를 하던 중 영광송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들어올리는 순간, 내 눈 앞에 힘줄이 튀어나온 웬 남자의 맨 발이 보였다. 발목까지 흰 천이 내려와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확 들어보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때 그 맨발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시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두 세 사람이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곳에는 항상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체험하게 해 주신 것이리라… .
이곳 오하이오 새 집으로 이사온 지 약 한 달 만의 일이다. 저녁 때 쓰레기통을 집 밖으로 끌고 나가는데 웬 미국 남자가 우리 집 앞을 산책하던 중에 우리 아들과 나를 발견하고 새로 이사왔냐며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하였다. 이 사람의 이름은 (Bill) 이며, 우리집 뒷편에 살고 있고, 가끔 성당에서 만나고 있다. 우리가 오로지 마라나타 샘과 성지 가까이에 살고 싶어서 이사를 왔다고 대답하자 그가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었다.
빌은 이곳 토박이여서 마라나타 성지가 생긴 유래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성지가 생기기 오래 전부터 지금의 성지 근처에 있는 미국의 한 화학 회사가 미국 전역에서 수거한 의학 폐기물들을 처분해왔는데, 그 대부분이 낙태된 태아들의 시신이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한 시간에 40대의 트럭이 그 곳으로 들어간 것을 봤다고 했다.) 처음에는 땅을 파고 묻다가 점차 특수 설비를 갖춘 공장을 지어 그 태아들의 시신을 소각해버렸는데, 공장에서 작업할 때 굴뚝에서 나는 연기가 우리 집 쪽이 아닌 동쪽 (클리브랜드 쪽) 으로 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95년 경 ‘마라나타 샘과 성지’가 생기고, 성모님께서 낙태를 방지하는 태아 묵주기도를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빌은 이곳의 샘물이 낙태된 태아들을 위해 흘리시는 성모님의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태아묵주의 효력인지, 지금은 그곳에서 낙태된 태아의 소각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처음 듣는 이 놀라운 사실에 전율하고 있을 때 그는 말을 이어갔다. 그는 자신도 가톨릭 신자이며, 이곳은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는 진짜 성지가 맞다고, 태아들이 낙태로 죽어가는 것을 보다 못해 성모님이 눈물 흘리며 발현하셔서 낙태를 방지하기 위해 묵주기도를 바쳐달라고 우리에게 애원하고 계신 것 같다고 했다. 아,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성모님께서 이곳에 발현하셔서 태아묵주를 주신 것이었구나 싶었다.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듣고 정말 이곳에 이사 오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아울러 우리는 인간의 죄 때문에 울고 계시는 주님과 성모님께 회개의 기도를 바칠 것을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아들이 성지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 하나의 기적이 아니었나 싶다. 아들 아이의 마음을 움직여서 후회하도록 하고 성지로 돌아오도록 성모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었다. 그동안 성지에서 봉사를 하며 우리 가족 외에도 많은 이들이 이곳 ‘십자가의 길’에서 은총을 받는 것을 많이 목격할 수 있었다. 이곳이 아직 인가가 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신부님도 계시지만 이곳을 찾는 성직자도 점점 늘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은총이 쏟아지는 잔치가 한창인데 인가가 나지 않았다고 문밖에 서서 멀건히 안을 들여다보고만 있을 사람이 있다면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구원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만을 구원하러 오시지 않았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 모든 백성들을 부르고 계신다. 피부색이나 종교를 막론하고 피조물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하느님의 자녀를 부르고 계신 것이다. 또한 성스러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뿐 아니라 죄인들을 간절히 부르신다. 하느님께로 돌아와 회개하고 거룩한 사랑의 삶을 살라고 외치신다. 예수님과 성모님의 메시지를 받아들은 모든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고 새로운 은총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발을 딛고 돌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고 또 각자의 신앙 생활이 더욱더 충실해지는 것을 나는 수없이 보아 왔다. 이곳에서 성모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오로지 ‘기도하고 기도하여라’ 다. 이 문구가 나는 이 세상 누구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가장 예쁜 말이 아닌가 싶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평화를 얻으십시오. 우리에게 이 모든 은총을 부어주시는 하나되신 예수 마리아 성심께 찬미드립니다! 아멘.
남 요셉/ 뉴저지
나는 골프 레슨을 하는 강사로, 새벽에는 아르바이트로 신문 배달 일을 하고 있다. 마라나타 샘과 성지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들어 알고 있었고, 아내가 여러 차례 함께 가자고 권유했지만 매일같이 신문을 배달해야 하는 새벽 아르바이트 때문에 2박3일의 여정에 선뜻 참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늘 “아내가 우리 가족을 대표해서 다녀오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어느날인가 갑자기 마음 속에서 마라나타를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일정을 어렵게 조정해 놓고 약간은 긴장된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순례에 합류하게 되었다.
순례 첫날 순례객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끝없이 기도와 찬송을 드리며 오하이오를 향해 전세버스를 타고 달려갔다. 점심식사 때를 제외하곤 9시간이 걸리는 버스 여행 내내 묵주기도와 자비심의 기도 등을 바쳤는데,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주님께 모든 것을 봉헌하고 의탁하는 마음이 들면서 왠지 마음이 가벼워지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하느님은 언제 어느 곳에나 계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현존을 확신하지 못했던 나는 예수님을 직접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니 소풍을 떠난 어린아이마냥 마음이 들떠서 버스 여행의 지루함도 느끼지 못했다. 오하이오 숙소에 도착한 직후 저녁식사를 끝내고는St Vincent De Paul Church로 달려가 미사를 드렸다. 이렇게 하루 종일 기도와 미사로 거룩한 시간을 가져서인지, 미사 후 나만의 조용한 시간을 갖게 되었을 때, 믿음이 약한 나에게도 성령님이 오셔서 함께 하심을 느낄 수 있었다.
저녁 미사가 끝나고 나서 밤 10시쯤 순례객들은 모두 마라나타 샘과 성지로 갔다. 그곳에는 각자 다른 말을 쓰는 다양한 민족의 순례객들이 하나되신 성심의 벌판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특히 스페인어로 기도를 드릴 때 그 기도 소리가 굉장히 아름답게 들렸다. 비가 왔었는지 잔디밭이 질퍽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야외용 간이 의자나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 묵주기도에 동참하면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두 분이 오셨다는 신호로 ‘무릎을 꿇으시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묵주 기도를 중단하고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죽여 메시지가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은 일어나 하늘과 언덕 위에 세워진 성상을 향해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발현시간에 많은 기적적인 사진이 찍힌다는 이야기를 듣고 온 터라 나 역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사진으로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겠지” 하는 기대에 부풀어 열심히 셔터를 눌렀다.
그런데 내 아내가 찍은 사진에는 성모님 성상과 하늘이 초록색으로 나왔지만 내가 찍은 사진에는 그저 회색과 검은 어두움만이 있을 뿐이었다. 또, 다른 순례자들의 카메라에서는 놀라운 사진이 많이 나왔지만 내가 찍은 사진 속에서는 이렇다 할 특별한 이미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내 믿음이 약함을 아시는 모양이구나!” 하고 부족한 내 믿음을 탓하며 반성했다.
이튿날 아침 일찍 미사를 드린 다음 성지로 다시 한번 가서 곳곳에 세워진 성상과 십자가의 길 등에서 기도를 드렸다. 통고의 성모상이 서 있는 ‘성모님의 눈물의 호수’를 돌며 칠고 묵주기도를 드릴 때는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평온함이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세상의 모든 걱정과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듯 마음이 가벼워지며 온화해지는 가운데, 내 영혼의 상처가 치유되는 듯 했다.
기도 센터에는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던 장소의 카펫을 보관한 축복지점이 있었는데, 성모님께서는 “하늘과 지상이 만나는 이곳에 청원문을 올려놓아라. 나는 그 청원을 내 아드님의 성심으로 가져가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신다. 아내는 집에서부터 작성해온 청원 편지를 올려놓고 기도를 드렸는데, 미처 준비를 해오지 못한 나는 급한 마음에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축복지점에 올려놓고 부모님의 건강과 아이들에 대한 소망과 함께 개인적인 청원기도를 드렸다.
십자가의 길에서 기도를 드릴 때는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한 처 한 처 마음에 깊이 새기며 기도를 드렸는데,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와 믿음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라나타 샘과 성지 순례 후 우리 가족에게는 많은 영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워낙 착실히 신앙생활을 하던 아내였지만, 그 전보다 더욱 신심이 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아이들 역시 신앙생활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예전 모습과 달리 신앙의 신비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또한 실 생활에서도 큰 변화가 생겼다. 지갑을 놓고 청원기도를 드려서 그랬는지,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는 한 부부가 5년만에 갑자기 전화를 해와서는 골프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또 필드에서 우연히 영사관 사람을 만난 뒤로는 레슨 손님이 차고 넘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이 기도 드린 첫번째 청원은 영주권이었다. 나는 2001년도에 한 골프장을 스폰서로 하여 나는 전문직으로, 아내는 비전문직으로 각각 따로 영주권을 신청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진행이 되지 않고 있었다. 불안과 걱정 속에서 하루 하루 막연히 기다리고 있던 우리 부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축복의 지점에 청원문을 올려놓고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순례에서 돌아온 이후 이민국으로부터 갑자기 내 영주권 신청서에 대한 추가서류를 제출하라는 통보가 와서 우리 부부는 서둘러 서류를 제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내 경력이 증명이 안된다는 이유로 I-140 취업이민 신청이 거절되었다는 통보를 받아, 이제는 비전문직으로 신청한 아내의 영주권을 기대할 수 밖에 없구나 하고 포기하는 마음이 들었다. 영주권 신청을 맡은 변호사도 내 영주권은 포기하고 아내의 것을 기다리라고 해서 실의에 빠져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성지를 안내했던 한 자매가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알고 거절된 서류를 보자고 하여 보여 주었더니, 거절된 서류에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며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반론을 제기할 수 있는 기한이 7일이 남았으니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충서류를 준비하여 넣어보라고 권하였다. 그 자매는 비 전문직은 시간이 많이 걸려 언제 나올지 모르고, 전문직으로 신청하는 것이 그나마 진행이 빨라서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니 포기하지 말라고 우리를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희망을 품고 전에 한국에서 근무했던 회사에 부탁해서 서류마감 시한 하루 전에 필요한 경력 증명 서류를 받아서 이민국에 제출하게 되었다.
마치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순간을 넘기고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불거졌다. 영주권을 스폰서한 골프장이 매각되어 중도금까지 받았다는 소식이 들리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아내는 다시 오하이오를 찾아가 성모님께 영주권을 받을 때까지 아무 일 없게 해달라고 눈물로 간절히 기도를 드렸는데, 그래서인지 골프장 매각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와서 우리 가족은 손을 맞잡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하루 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이번에는 이민국 인터뷰가 큰 문제로 다가왔다. 경력 증명 문제로 고비를 겪었던 나는 인터뷰 과정에서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질까봐 노심초사하며 인터뷰 없이 영주권을 받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변호사 말에 의하면 최근에는 이민국 심사가 까다로와져서 인터뷰 없이 영주권을 받을 확률이 10%도 채 안된다고 하였다. 역시 매달릴 곳은 하느님밖에 없었다. 아내는 또다시 마라나타 성지에 순례를 갈 때마다 축복의 지점에 “인터뷰 없이 영주권을 받게 해달라”고 청원문을 올려놓고 기도하였다. 성모님의 강력한 전구로 우리의 청원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셨는지 거절되었던 내 취업이민 신청서류가 마침내 승인이 되었다. 우리 가족은 너무나도 기뻐 또다시 눈물로써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취업이민 승인 후 I-485를 기다리는 동안 워크퍼밋을 신청했다. 일반적으로는 신청 후 3개월 정도 지나야 워크퍼밋이 나온다고 하였는데, 아내는 서류를 넣자마자 2주 후에 워크퍼밋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신청한 지 3개월이 지나도 아무 연락이 없어서 답답해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하느님께 매달려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똑같이 넣은 서류가 3개월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면서 나에게 기도할 것을 권유했다.
기도에 소홀했던 내 자신을 자책하며 아내와 함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함께 기도하면서 아내의 기도를 들어보니 자신보다 내가 영주권을 먼저 받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고마운 마음에 왜 그렇게 기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병상에 누워 계신 한국의 어머님을 찾아뵐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동안 어머님께서는 미국으로 건너간 맏아들을 몹시 보고 싶어하셨지만 ‘영주권 신청중’이라는 사슬에 묶인 나는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이런 나의 아픔과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안타까운 마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아내의 따뜻한 기도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직 워크퍼밋도 받지 못했던 나는 아내보다 영주권을 빨리 받게 될 것이라고는 사실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주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고 하더니, 아내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 생일날 인터뷰 없이 영주권을 먼저 받게 되는 꿈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아내의 배려에 감사하면서 오랜 소망이었던 한국 방문길에 올라 어머님과 꿈 같은 시간을 보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영주권을 받고도 한참 후에야 그것을 받았는데, 아내가 영주권을 받고 난 15일 후쯤 그 골프장이 매각되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으니, 만약 내 영주권 신청을 포기하고 아내가 영주권 받기만을 기다렸다면 골프장 매각으로 인해 영주권을 받을 수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등이 서늘해졌다. 이 모든 과정을 되돌아 볼 때 고비 고비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마라나타 순례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늘 축복의 지점에 올려놓고 드렸던 아내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족이 원했던 모든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주셨는데, 기적과 같은 이 모든 일을 겪으면서 오묘하신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 성모님의 사랑과 도움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 존재의 작음과 하느님 아버지의 무한한 자비와 사랑, 그리고 하느님께 삶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사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이 모든 깨달음과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찬미와 영광을, 우리 가족의 간절한 기도를 위해 전구해주신 성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서 마리아/ 뉴욕 퀸즈
찬미 예수님! 수 년 전, 친구의 권유로 마지못해 오하이오 마라나타 샘과 성지의 순례길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깥 일을 하는 나로서는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평일이 낀 2박3일의 순례 여행은 선뜻 결정하기 힘든 것이었다. 당장 문을 열어야 하는 비즈니스도 문제였고, 가족을 두고 2박3일간 홀로 여행을 한다는 것도 나로서는 쉽게 결정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성지에 가서 은총을 받고 싶다는 생각에 여러 가지 유혹을 뿌리치고 순례길에 오르게 되었다.
처음 떠나는 순례 여행에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올라 탄 버스는 장장 9시간이 걸려 오하이오에 우리를 내려놨다. 그때는 9월 15일 십자가 현양 축일이었는데, 인종과 언어가 다르고 각자 사는 곳이 다른 수많은 순례객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니 놀랍기도 하고, 나도 그런 순례객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기뻤다. 나는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며 순례에 참여하였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신다는 시각이 가까워올 때 모든 순례객들은 하나되신 성심의 벌판에 모여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었는데, 영광의 신비를 바치던 자정쯤 된 시각에 무릎을 꿇으시오 하는 안내자의 음성이 들려왔고, 모든 사람이 기도를 멈추고 숨죽여 예수님께서 메시지 주시기를 기다렸다.
발현이 끝난 후 순례객들은 남은 묵주기도를 마치고 잠시 기다렸다가 예수님께서 주고 가신 메시지를 전해 들었는데, 특히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거룩한 사랑에 대한 메시지가 마음에 와 닿아 이것을 실천하겠다고 마음에 새기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순례객들은 모두 성지 곳곳을 돌며 정성되이 기도를 바쳤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나도 이들과 함께 새 예루살렘의 문턱에 도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에 기쁨이 넘쳤다. 이 곳에 한 발이라도 들여놓은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받은 수호천사 외에 또 한 분의 천사를 주신다고 하신 메시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든든했다. 성모님께서 눈물로 채우셨다는 ‘눈물의 호수’에 다다랐을 때는 그 물에 발을 담그며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 주실 때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발만이 아니라 온 몸, 온 마음이 깨끗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또 오후 3시에 기도센터에서 자비의 기도를 드릴 때는 음악으로 드리는 자비의 기도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마치 천상에 오른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지금도 귓가에 잔잔하게 울려오는 그 기도 음악 속에서 그곳에 참석한 각양각색의 사람들은 평화 그 자체를 느꼈다.
순례를 다녀온 후 나는 나의 변화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는 깨닫지 못하던 잘못들, 아주 사소한 잘못도 더 잘 깨닫게 되고, 회개하게 되고, 깊은 평화를 느끼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발현지에서 주신다고 한 양심조명의 은총 같았다. 또 계속해서 메시지를 받아 읽고 생활에서 실천하려고 애쓰면서 마음이 점점 평화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상처 받고 화내고 했을 일들도 평화로운 마음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한 사람의 작은 희생과 기도로도 가정이 구원되고 나라와 세계가 구원된다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나는 더욱 기도에 힘을 쏟고, 나에게 오는 시련은 그 어떤 것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감당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하느님의 자비 축일에 발현하신다고 메시지를 주셨다. 그곳에 순례를 가려면 기도와 희생으로 준비하고 오라시는 성모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자비의 9일 기도를 드리며 순례를 기다렸다. 봄철이라 날씨도 좋았지만 자비의 축일이라 그런지 더욱 많은 사람이 함께 순례에 참여했다. 언젠가 메시지에서 “고통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삶에서 우리는 영적, 육적으로 힘들고 찌들어 있었지만, 우리를 향한 성모님의 따뜻한 부르심과 그곳에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며 모두 한마음으로 순례길에 오르며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이 모든 하느님의 섭리를 보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며, 하느님을 신뢰하고 당신의 돌보심을 믿습니다. 주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아멘.”
어느새 다음 순례가 기다려진다.
이 마리아/ 뉴욕
메주고리에 성지 순례중에 만나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 한 자매님이 계시다. 순례 여정 내내 나에게 도움을 주셨던 그 분이 그 순례 여행에서 특별한 은총을 받으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우리는 함께 자비하시고 전능하신 하느님께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었다. 어느날 그 분이 오하이오 주 마라나타 스프링이라는 곳에서도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그곳에서는 발현의 증거로 특별한 기적을 보여주시는데, 눈으로 직접 보기도 하고 사진을 통해 보여주시기도 한다고 했다. 또 성모님께서 주시는 기적수가 있는데, 루르드의 샘물과 같은 치유 효과가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하셨다. 그동안 여러 곳에 성지 순례를 다녀봤지만 돌아오면 늘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아쉬움 때문에 고민하던 나에게는 무척이나 기쁜 소식이었다.
큰 비용과 시간을 들여 지구를 돌아 멀리까지 성모님께서 발현하셨다는 곳에 가보았지만 기쁨은 잠시일 뿐, 돌아오면 언제나 예수님과 성모님의 현존에 대한 그리움과 목마름이 더욱 커져만 가던 터라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의 발현에 직접 참석할 수 있다는 말은 나를 설레게 했다. 여러 곳을 순례해보니 방문했던 각 성지마다 독특한 은총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다른 데서 느끼지 못했던 광범위한 평화가 나를 감싸서 ‘아, 이곳이 진정한 새 예루살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과 성모님께서는 일 년에 네 차례 이곳에서 대중에게 발현하여 메시지를 주시는데, 내가 순례를 갔던 때는 2003년 12월 12일로, 000000 축일로, 예수님과 함께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메시지를 주셨다. 이렇게 대중에게 발현하시는 것 외에도 두 분은 마라나타 스프링에서 열리는 각종 기도회 등에서도 선견자인 모린 스위니 카일 자매에게 발현하시어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 계시다는데, 지금까지 주신 메시지의 양과 깊이는 참으로 놀라웠다. 또한 성모님께서는 카일 자매에게 성모님께서 영혼뿐 아니라 육체도 함게 발현하신다는 것을 증거로 보여주시기 위해 자매의 어깨 위에 성모님의 머리카락 한 가닥을 얹어주셨다고 한다
마라나타 스프링의 입구에 들어서자 마자 오른편에 있는 기도센터에는 이 머리카락이 진열되어 있는 방과 성모님께서 10년 동안 발현하셨다는 장소의 카펫을 동그랗게 오려 진열한 축복의 지점(Blessing point)이 있었다. 기도의 집을 지나면 성모님의 눈물로 채워졌다는 눈물의 호수와 통고의 성모 마리아 상이 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천사들이 내려와 지키고 있다는 천사들의 호수가 있었다. 안으로 깊숙이 더 들어가면 왼쪽에 넓은 들판이 나오는데, 이곳이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대중에게 발현하시는 장소였다. 들판 입구에는 성모님께서 물이 나올 터이나 파라고 하셨다는 샘물이 있는데, 지금은 그곳에 펌프가 설치되어 있어 누구나 편리하게 물을 받을 수 있었다. 들판 한가운데로 나아가면 얕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위에는 예수님 상과 성모님 상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벌판 맞은편 끝에는 숲으로 들어가는 작은 입구가 있었는데 이곳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게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는 오솔길이었다. 이밖에도 들판 곳곳에는 기도하거나 묵상하도록 공간이 질서있게 마련되어 있었다.
그 중 한 곳에 앉아 푸른 들판을 바라보니 “야훼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나를 뉘어 주시고” 하는 성경 구절처럼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 피난처에 와 있구나 하는 기분이 들었다. 샘물을 병에 받으려고 펌프 앞에 줄지어 선 형제자매들의 모습은 루르드에 갔을 때 기적의 샘에 줄지어 서 있던 수많은 환자들의 모습이 떠오르게 했다. 또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시기 전 승리의 벌판으로 행진이 있었는데, 그 모습은 루르드에서 본 촛불 행진을 연상시켜 마치 새 예루살렘의 축하식에 참석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발현이 있던 날 밤, 모든 순례객은 발현하시는 장소인 승리의 벌판에 나가 예수님과 성모님 상을 바라보며 모두가 한마음으로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날 밤은 비가 오고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두꺼운 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나는 추위에 떠느라 묵주기도를 바치는 시간이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그러나 분심을 쫓아내기 위해 추운 겨울날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을 떠올리며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자정이 가까워오자 어디선가 갑자기 “무릎을 꿇으시오!”라고 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이는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셨음을 알리는 것으로, 그 순간 모든 사람이 기도를 멈추고 제 자리에 무릎을 꿇고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메시지를 주시는 동안 침묵을 지키며 기다렸다.
이때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뵈려고 고개를 들어 언덕 위에 세워진 예수상과 성모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떤 알 수 없는 빛이 줄기를 이루며 빛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의심이 들었던 나는 저건 플래시 불빛에 반사된 빗방울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애써 그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 빛이 모두 한 곳으로 모이더니 폭포수 같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는 천자락 같기도 한 모양으로 두 성상이 세워져 있는 언덕으로 쏟아져 내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다.
발현이 끝나고 메시지가 선포된 다음 두려운 마음을 안고 호텔로 돌아와 보니 빗속에 들판을 걸었던 탓에 신발이 온통 젖은 흙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신발을 물로 씻고 있는데 하느님께서 “거룩한 곳이니 신발을 벗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곳에서 예수님과 성모님을 통해 예수님 심방의 비밀을 전해주시고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일치를 이루며 살라는 메시지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보니 전날 밤하고는 아주 다르게 파란 하늘이 드높고 맑게 개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말거나 나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내 영혼 주를 찬양하리니 … 크시도다 주 하느님” 하고 성가를 부르며 아침 기도를 대신하여 하느님께 하루를 봉헌하였다. 아침 미사를 드린 후 발현지에 빨리 가보고 싶은 급한 마음에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성지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성지를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여기 기후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고, 하느님만이 아신다” 며 이곳의 예측할 수 없는 변화무쌍한 날씨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자의 말에 다시 한번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하늘은 마치 티 없으신 평생 동정이신 성모님의 성심 같았다. 맑고 푸른 하늘은 성부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아랫 자리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펼쳐주신 어머니의 푸른 망토 자락 같았고, 하얀 구름은 성모님의 부드럽고 포근한 거룩한 사랑의 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올 어머니….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향할 때’를 나즈막히 부르고 나서 내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하게 해달라고 간구하며 묵주기도를 시작했을 때 내 마음이 찬양으로 가득 차 감격의 눈물이 뜨겁게 흘렀다.
한낮이 되니 따스한 햇빛이 우리를 골고루 비추었다. 순례객들은 하늘의 태양을 향해 카메라를 대고 사진 찍기에 바빴는데, 여기 저기서 놀라움에 “Oh My God!”이라 외치는 탄성과 웅성거림이 이어졌다. 십자가의 길 14처를 돌 때 간밤의 비로 군데 군데 물 웅덩이가 고여 있어서 무릎을 꿇진 못했지만 골고타 언덕으로, 갈보리산으로 한 처 한 처 예수님을 따라 걸었다.
기도와 묵상중에 피와 땀에 범벅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과, 그 고통의 길을 함께 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묵상하면서 우리가 살면서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는 그 어떠한 것도 비할 바가 못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자 오히려 삶에 대한 용기가 솟아올랐다.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께 모든 흠숭과 찬미를 드리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바쳐야 할 기도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범사에 감사하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게 해달라고 지향과 결심을 드렸다.
2008년 9월 8일 성모님 통고의 날에 순례를 갔을 때였다. 다리가 퉁퉁 부어 지팡이없이는 잘 걷지 못하시던 아녜스 자매님과 성모님의 ‘눈물의 호수’에서 기도를 드릴 때였다. 많은 사람들이 아픈 곳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며 물을 몸에 바르거나 발을 물에 담그고 있었는데, 그 자매님은 아픈 다리를 구부릴 수가 없어서 내가 호숫물을 손으로 떠서 다리에 발라드렸다. 그곳에서 통고의 성모님께 기도를 드린 다음 하나되신 성심의 벌판으로 나갔을 때 그 자매님은 지팡이에 의지하는 대신 모든 것을 예수님께 의탁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를 외치고는 지팡이 없이 나의 손을 잡고 벌판을 걸으며 기도를 드렸다. 지팡이 없이 걷던 그 자매님은 감사와 기쁨에 가득 차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나도 성모님께 지향과 결심을 드리고 아녜스 자매와 함께 기쁨에 겨워 성가를 불렀는데,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은총의 순간이었다.
아녜스 자매님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나는 순례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주에 그 분을 다시 만났다. 그 분은 만나는 동안 내내 지팡이 없이 잔디밭에 서 있었는데, 자매님은 그때까지 그렇게 오래 지팡이 없이 혼자 서 있었던 적이 없을 만큼 많은 치유를 받았다고 말했다. 너무나도 감사한 우리는 함께 순례를 다녀온 다른 자매님과 셋이 만나 그 다음주에 감사와 찬미의 기도를 함께 드렸다.
기도의 집에 있는 축복의 지점(Blessing Point)에서 순례객들은 준비해온 각종 청원문과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 성물을 올려놓고 성모님께 축복을 빌었다. 나는 미처 성모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준비하지 못한 관계로 그 대신 나의 온 마음과 몸을 봉헌하면서 성모님께 모든 것을 내맡기기로 했다. 그래서 휴대한 모든 짐을 축복의 지점 위에 올려 놓고 그 위에 짐과 테이블을 감싸안듯 윗몸을 엎드려 성모님께 축복을 청하고 나니 흐믓하고 행복했다.
매번의 순례여행이 그렇지만, 2박3일의 길지 않은 시간은 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리는 것 같다. 돌아올 때면 모두들 아쉬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서는 서로의 체험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데, 이 시간은 우리 각자가 받은 은총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고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해주었다. 마라나타 스프링에 한 발이라도 내딛은 사람에게는 양심 성찰의 은총을 주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매번 새로워진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 전에는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거룩한 사랑”으로 하루를 살았는지 매일 양심 성찰을 하고,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신앙생활을 티 없으신 성모성심께 봉헌하겠노라 약속드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첫 순례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늘 성모님과 대화하며 성모님과 예수님께 드린 약속을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나는 하느님을 사랑했지만 하느님보다는 ‘나’와 내 가족들을, 하늘나라보다는 이 세상을 더 사랑했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열심하다는 평판을 들을 정도였지만 내 신앙은 하느님을 중심에 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물질적 풍요와 명예를 더 중시하는 것이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올바른 자녀로 키울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좋은 학교에 보내고 그들에게 보다 더 나은 미래가 보장되는가가 나의 관심사였고 기도 제목이었다. 그러나 마라나타 스프링의 순례를 다녀오고 나서 나는 내가 얼마나 잘못된 삶을 살아왔는지를 깨닫고 주님께 용서를 청하였다. 또한 가족들에게도 나의 부족함과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 새로운 화해의 삶을 시작했다.
가족들 간의 보이지 않던 벽이 허물어져 온 가족이 열린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다. 가족들도 하느님을 향하여 돌아서기 시작했고, 나의 신앙생활에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순례여행을 떠나려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불평하던 가족들이 지금은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주고 챙겨준다. 내가 아파 누웠을 때는 딸이 나를 대신해서 메시지를 프린트해와서 잘 알아듣도록 또박또박 읽어주었고, 특히 남편은 나와 함께 순례 여행에 동행은 하지 않을지라도 마음으로 함께 하는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다.
직접 눈으로 성모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여러가지 예상치 못했던 기적적인 현상들과 다른 형제 자매님들의 체험, 또 주님의 현존과 돌보심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신 사진 속의 증거들, 특히 하나되신 예수 마리아 성심의 사진과 성모님께서 직접 선견자의 손을 붙들고 그려주신 새로운 성모상, 진리를 사랑하고 거룩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라는 메시지 등등… 마라나타 스프링을 순례하면서 겪은 많은 체험과 깨달음, 메시지들은 나의 영적 목마름을 채워주었다. 그동안 주님을 향한 나의 믿음을 굳세게 해줄 그 무언가를 찾아다니던 방황은 이제 끝이 났다.
이 순례는 또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다. 지속적으로 메시지를 받아 읽고 마음에 새기며 그 가르침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순례는 어느새 새 예루살렘을 향해 나가는 성화의 여정으로 바뀌었다. 발현지에서 나는 이미 하느님께 맛들이고 주님의 은총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으며,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매일 매 순간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메시지는 나로 하여금 이 복잡한 세상에서도 점점 단순해져서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는 평화와 기쁨만을 찾아 누리게 함으로써 성경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나의 믿음에 생기와 풍요로움, 주님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용기를 주고 있다.
첫 순례 이후 나는 1년에 서너 차례씩 마라나타 스프링을 찾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직 승인도 나지 않은 곳에 왜 가느냐고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루가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가 생각난다. 죽어서 저승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형제들이 회개하도록 라자로를 아버지 집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자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가 16:19-31) 하고 말한다.
요즘 세상에는 300곳이 넘는 곳에서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발현하신다고 한다. 그만큼 구원사업이 급박히 이루어지고 있는 증거리라…. 발현지와 메시지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승인이 나기까지는 모든 발현과 메시지의 전달이 끝나고 나서 오랜 시간의 확인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먼 미래의 승인이 난 이후가 아니라 지금 현 순간의 우리를 위해 주시는 것이다. 파티마에서 성모님께서 주신 메시지도 교회의 승인이 난 이후가 아니라 메시지를 믿고 실천한 시점에서 은총을 주셨다. 나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대중발현 예고 메시지를 접할 때마다 예수님과 내 어머니께서 세상에 오시는데 크리스챤으로서 내가 어찌 이를 거절할 수 있으랴 하는 마음으로 다음번 순례를 기다리게 되고, 그곳에 갈 때마다 성모님과 예수님께서는 늘 새로운 은총을 주신다.
마라나타 스프링은 한 번 다녀오면 추억으로 남는 성지가 아니라 목마를 때면 언제라도 들러 목을 축일 수 있는, 목마른 양과 길 잃은 양, 세상 모든 양들에게 열려 있는 예수님의 넘치는 자비의 샘이며, 잘못된 길로 빠지지 말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시는 목자의 부르심이다. 열두 제자를 불러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처럼, 피부색이나 믿음에 상관없이 당신께서 창조하신 모든 자녀를 하느님께로 불러모아 믿음의 전통으로 돌아가도록 은총을 주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메시지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도 은총이 되시기를 빈다.